"차표 한장 손에 들고 떠나야 하네 예정된 시간표대로 떠나야 하네 너는 상행선 나는 하행선 사랑했지만 갈길이 달랐다. 이별의 시간표대로 떠나야 했다." 90년대 많은 사람들이 애환을 담아 즐겨부르던 한때 유행하던 노래이다. 여기 가사 한 구절이 어린 시절을 떠올리며 가슴속 깊이 파고들어 그리움 그 자체로 진한 여진을 남기고 있다.
완행선 열차에 꿈을 싣고 달린다. 어릴적 비둘기호를 타고 꿈에 부풀어 상경하던 그 시절, 개구리가 올챙이였던 마음으로 더듬어 그때가 좋았던 같다. 그 시절에는 모든 것이 부족했던 때라 시골에서 서울 한번 가는 것도 무척 어려웠다. '안동역에서' 노래가사에서 나오는 그런 주인공 처럼 사연은 다르지만, 밤열차를 기다리면서 청춘의 부푼 꿈을 안고 상경하기 때문에 비둘기 또는 통일호로 중앙선을 타는 것만으로도 왠지 마냥 행복했다.
원래 일제 강점기의 기차는 1등칸에 일본인과 친일파 고위직이 타는 곳이고, 2등칸은 친일파, 3등칸은 조선사람들로 신분에 따라 구분해서 탈 수 있었다고 한다. 이는 해방이후에 이런 개념이 완전히 바뀌어 직행 급행 완행으로 구분되었고 새마을, 통일호, 비둘기호에 해당된다. 경제적 수준에 따라 승객의 선택에 의해 새마을호는 주로 부유층이 탔고, 무궁화 통일호는 중산층, 비둘기호는 서민들이나 학생들이 대부분 이용했다.
비둘기호는 복선이 아닌 단행선이 대부분이라서 반대편에서 오는 열차를 비켜주기 위해 간이역에서 정차해야했고, 완행선이라 매 역마다 서서 손님들을 승하차시키기 위해 정차해야 하므로 그만큼 시간이 더 걸린다. 그래도 청춘의 꿈이 불타오르던 시기이었기에 서민들 또한 그 정도의 불편은 기꺼이 감내를 한다.
당시 완행열차는 서울 근교 교외선이나 경춘선 같은 곳에서는 젊은 청춘 남녀들의 낭만과 추억을 실어나르기도 했고, 설레임과 함께 그리움을 싣고 신나게 달렸다. 그래서 비둘기호에는 시련과 아픔도 있었을 뿐만아니라 희망도 낭만도 사랑도 늘 함께 있었다. 그 당시 홍익회 직원들이 객석통로 사이로 수레를 끌고 다니면서 "따끈따끈한 삶은 계란 심심풀이 땅콩 오징어 음료수가 있어요."라고 외치는 소리는 백미 간식거리로 지금도 추억거리로 와닿아 기차여행을 더 행복하게 해주는 모습이었다.
레일바퀴가 빨라지는 만큼 철로 이음매를 지날 때마다 털컹 털컹 소음이 객실 안으로 고스란히 전해지기도 했다. 특히 중앙선은 터널도 많고 터널이 길고 유난히도 많아 객실내부가 어두울 때도 자주 있었고, 내부 차창가에 비친 자신의 자화상을 바라보며 회상에 잠길 때가 많았던 듯하다. 그것도 잠시. 지금은 그냥 저 너머로 사라진 과거로만 남아있을뿐 진풍경들이다.
그후 80년대 중반들어 사회생활과 함께 남부지방으로 출장차 갔을 때 처음으로 새마을호를 타고갈 기회가 주어졌는데, 팔걸이 발걸이와 함께 뒤로 제켜지는 편한 등받이가 있어 안락하고 넓직한 의자로 여유롭고 꽤 폼나 보인다. 철도청 직원들이 유니폼 차림으로 단정하게 입고 베푸는 서비스, 그리고 식당칸이 있었고, 한번 타보면 모든 면에서 편리해 남부러울 것이 없다.
그후 몇 차례 새마을호를 더 타 보긴해도 요금이 비씨서 주로 무궁화 통일호를 많이 이용했던 걸로 기억한다. 그런데 몇 번을 더 타보니 편한면도 있지만 마냥 즐거운 것만은 아닌 듯했다. 마음이 참으로 변덕스워서 그런지 몰라도 낮에는 잘 모르겠는데 특히 밤열차는 새마을호와 통일호의 내부 분위기가 확연히 다르다. 통일호나 비둘기호에는 장거리 여행동안 낯선 승객들끼리 도란도란 마주앉아 금새 세상사 이야기와 웃음꽃으로 피어나는데 반해, 새마을호에는 겨우 책이나 신문 넘기는 소리 정도로 조용한 가운데 승객들의 뒷통수만 보여 어찌보면 좀 띡딱해 보이는 장면 연출이다 보니 여행이 지루할만도 하다.
새마을호이든 통일호이든 비둘기호이든 가는 길도 똑같고 목적지도 같은데, 더 빨리 가려고 제아무리 뛰어도 결국 그 기차안이고 목적지도 같을 뿐이다. 그래서 새마을호가 좀 밋밋하고 재미가 없어 지루했다면 중간에 내려 쉬어가기도 하고 무궁화나 통일호로 갈아탈지라도 기왕이면 같은 승객들과 함께 여행을 재미나게나 갈 것이지, 이제서야 그런 걸 조금 느끼다니 아쉬움으로 남는다.
종착역에 내려 택시나 버스를 타러 가보면 줄서 기다리면서 새마을호와 통일호에서 함께 내린 모든 승객들은 서로 뒤죽박죽 섞이고 만다. 인생살이도 마찬가지 조금더 일찍 목적지에 도착한들 자연스럽게 합류되면서 그 길을 뒤따라 가기 마련이다.
이런 열차속 낭만도 우리들에게는 꿈을 실어다 주었고, 그 아스라한 추억도 지나가는 바람과 함께 다 사라지고 요즘은 대부분 초고속 KTX로 대체되어 버렸다. 이젠 안동역도 이전해 가버렸고 통일호 비둘기호도 철새처럼 어디론가 모두 날아 가버리고, 역사의 교착지를 현대인의 시각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다하더라도 과거와 현재가 서로 교차하면서 아스라한 과거로만 남아 있을 뿐이다.
'글 수필 > 삶' 카테고리의 다른 글
글쟁이 흉내내기 부터 시작 (0) | 2021.07.09 |
---|---|
풍광이 빼어난 곳에서 흥이라도 (0) | 2021.06.30 |
아침 출근길에도 꽃길따라 (0) | 2021.06.17 |
단조로움 보다는 다양성 (0) | 2021.06.05 |
너 아버지 뭐하시노? (0) | 2021.03.25 |